각각의 영적 단계 마다 다른 영의 음식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신 32:13-14)
우리는 이 말씀을 구약의 이스라엘 대한 것이고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면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어떻게 준비하셨는지에 대한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 안에는 영적 성장을 위한 또 다른 깊고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아버지들은 영적인 삶의 첫 번째 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은 서로 다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에 필요한 각각의 특별한 영의 음식이 있다.”
인간은 혼(soul), 생각(mind: maestro of soul) 영(spirit) 그리고 육(body)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육의 음식은 잘 알고 있지만 다른 구성 요소에도 각각의 특별한 영의 음식 있다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요일 2:13)
사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초대교회 아버지들의 이러한 확신의 뒤에는 타락(원죄) 후 인간 내면의 구성 요소들이 서로 분리된 것에 죄의 뿌리가 근거하고 있다는 그분들의 깨달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하나로 조화된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 했습니다. 하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따로 일하고 감정이 개별적으로 일하는 식이 되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네 마음(heart)을 다하고 목숨(원어는 soul)을 다하고 뜻(원어는 mind)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은 우리 인간 구성의 요소들이 서로 분리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위대한 구원은 인간의 분열된 구성요소들을 다시 하나로 연합되게 해서 하모니를 이루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계명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순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13)
우린 모두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알았지만,
그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성령 안에서 성장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우리의 미션을 완성시키면 된다고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아버지들은 구원은 사람의 내면 안에서 충만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게 되고 그 영광이 하박국과 이사야서에 기록된 것처럼 이 세상을 덮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을 덮을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알고 있고 그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영광이 온 땅을 덮으려면 그분의 영광이 먼저 그의 백성들 한 명 한 명에게 드러나고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속 내면이 분열되어 있다면 주님의 영광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내면의 구성요소들의 분열이 회복되어 하나로 다시 연합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믿는 자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믿는 자 안에 거한다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사도 요한 또한 같은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연습하는데 맞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 효과와 실제를 경험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야 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의 내면 구성요소들이 하나로 연합(inner unity)되어 회복된 후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분열이 본래의 조화된 모습으로 회복된다면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진정한 연합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 세대의 교회는 아주 중요하고 근본적인 진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의 진리들을
믿음으로 연습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서는 말씀에서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배워서 다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우리 안에서 잘 적용이 되고 있고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완전한 영적 진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우리 내면의 상태를 다른 차원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런 이해는 구원의 위대함을 나타나게 하며 우리를 다른 영의 차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더 높은 영의 차원의 단계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단계의 영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가 머물러 있는 영적 단계는 구원만을 선포하는 단계입니다: 믿는 자들 또한 그 수준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으며 이 단계에서 여전히 주님과 화평하면서 사역 가운데 열매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는 여전히 그들의 삶 가운데서 죄가 있습니다. 죄는 아직도 그들 안에 숨어서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약한 부분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믿는 자들은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래, 이게 정상이야. 이런 것들이 우리가 없애야 할 옛 사람의 특징들이지.” 또는 이런 말로 자신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우리 죄는 주님 안에서 용서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맞는 말이고 100% 성경적입니다.
하지만 이 세대와 시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그런 죄들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를 흠도 점도 없이 거룩하게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깨끗하지 않고 더럽다면 신부의 장신구로 단장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지금 그리스도의 신부를 위해 마지막 장신구들을 준비하고 있으며 믿는 자들에게 이 장신구들을 달아주어 신부로 준비되기를 너무도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령님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람들 안에 있는 얼룩들 때문에 장신구를 달아 주실 수가 없어서 멈추어 계십니다. 먼저 얼룩들을 씻어야만 합니다. 신부는 신랑처럼 되어야 장신구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성품이 뚜렷하게 나타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성품 안에는 죄의 얼룩이 없습니다. 마지막 장신구로 단장되기 전에 예수님의 얼굴이 우리 얼굴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읽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에만 너무 흠뻑 빠져있습니다. 이 세대의 깊은 갈망과 욕구는 우리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은혜가 우리 세대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제한된 능력 또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저 관점으로 옮겨 다닙니다. 그분께로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산 정상에서 장신구들로 단장될 것이며 산 밑에서는 그것들로 단장될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삶에는 더 이상 죄가 다스릴 곳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 3:9)
“…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롬 5:21)
이것이 초대교회 아버지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의 구성 요소들을 위한 특별한 종류의 영의 음식과 관련된 확신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영적 아비 된 자는 자신의 제자들의 영적 단계와 그 단계에 맞는 영의 음식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분들은 “영적 아버지”라는 호칭을 “상담자”, “선생님” 혹는 “멘토어” 라는 호칭들 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육의 아버지는 자녀의 나이, 성장, 그리고 어떤 종류의 음식들이 필요한지 잘 압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모유를 먹어야 할 아기에게 절대로 고기를 주지 않습니다. 부모로서 아기에게는 우유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아기가 자라면 음식의 종류도 바꾸어 주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영과 관련된 일들도 정확하게 똑같습니다.
지금 주님의 교회 안에는 진정한 영적 아버지들이 부족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일종의 책임감과 나눔에 관련된 아버지 됨만 남아 있고 주님께 직접 받은 부르심과 은사로서의 완전한 그림인 아버지 됨이 없습니다.
속 사람이 자라면 그에 따른 영의 음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시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 21: 15-17)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교회에 대한 책임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위의 말씀은 교회를 보살피고 돌보는데 있어서 “먹인다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첫 번째 책임이 바로 영을 먹이는 것이었다는 것이 위 말씀을 통해 명확히 나타납니다.
위 말씀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 세 가지의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표현들의 차이는 헬라어를 보면 확연히 나타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첫 단계의 음식을 말합니다. 이 양들은 작은 어린 양이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특별한 음식들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 첫 단계에서 필요한 음식이 우유라고 강조했습니다:
“…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 (베전2:2)
두 번째 구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두 번째 단계에서는 먹이는 것뿐만 아니라 치는 것도 필요 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양을 치라고 말하는 이유는 가르침을 받고 말씀을 듣고 영의 음식을 먹었음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의 내부 장기에 문제가 있는 아이는 음식을 먹어도 소화를 못하기 때문에 성장 하지 않습니다. 이 단계에 있는 믿는 자들도 이런 상황과 같아서 영의 음식은 먹지만 흡수가 되지 않아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영의 음식을 먹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사람 안에 성장을 방해하는 숨어있는 부분들도 다루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사실 영적인 통찰력과 분별력이 필요한데 이것은 흔하지 않은 은사입니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믿는 자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들의 원인은 영적인 통찰력과 분별력의 부족에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 예수님은 “먹이라” 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시는데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지 않으시고 대신에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뜻은 그들이 이제 모두 성장했고 그들 속에 있는 방해물들도 다루어졌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장애물들이 해결된 후이니 이제 그들에게는 장성한 자의 음식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우유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고 장성한 자에게는 단단한 음식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 5:12-14)
이 말씀은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있고 이 음식들이 흡수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다루어져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간 단계의 영적 성장에 있어서 가장 큰 방해는 좁은 길을 걸어가신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순종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실제로 혼(soul)은 어떻게 순종하는지를 배울 때까지 많은 돌봄이 필요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생각과 혼의 영역에 특히 많은 방해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구성 요소들이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아직 하나로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구성요소들이 하나되어 연합을 이루기 시작한다면, 마음(heart)은 순종의 길에 똑바로 서서 주님만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영의 음식들을 소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매달 매달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요즘에는 해가 지나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런 영적 성장을 찾아 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신 세 번째 단계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장성한 자를 위한 단단한 음식을 의미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신비가 있습니다. 이 세 번째 단계는 중간 단계와는 다른 단계이며 계명에 순종하거나 의로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장성한 자들이므로 그들에게는 한 가지가 더 요구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연이어서 말씀하신 다음 구절에서 정확하게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이 말씀의 실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진리는 성경의 여러 부분들에서 명확하게 찾을 수 있으며 심지어 신부의 사랑에 대해 기록한 아가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번째 단계의 영적 성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 상식에 어긋나는 것들을 수용하고 그 길을 걷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그 이전 단계의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들을 순종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중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란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하던지 간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임을 배웠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시험을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믿는 자로서 계명에 순종한다면,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매우 어려워 보이는 일들에 직면하게 되는데, 때로는 수치를 당하는 상황에 자신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일 때문에 시험에 들 수도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닐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길은 거기에 맞는 영광이 따라야 한다고 보는 인간적 지혜에 근거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자신도 수치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또한, 팔복에서 예수님은 의로 인해 거부당하며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으니라” (마 5:10-12)
사실 세 번째 단계에 있지 않다면, 즉 세 번째 단계에 적합한 음식을 먹고 소화하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받아들이기란 어렵습니다. 이 단계의 영의 음식은 반드시 세 번째 단계를 이미 거쳐 간 사람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음식을 주는 사람이 경험을 바탕으로 말할 때 은혜와 생명이 음식을 받는 사람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듣는 자들의 생각이 새롭게 되어 이전에는 받을 수 없었던 사실들과 진리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길에는 고난도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서서히 눈을 뜨게 됩니다. 사실 고난은 우리를 주님께로 더 가깝게 인도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세상의 것들로부터 더욱 구별됩니다. 갈라디아 전서 1:10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가 그리스도가 받으셨던 수치를 수용하고 받아들 때 죄의 수치로부터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부의 마지막 장신구로 단장될 준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부의 책인 아가서의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 2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5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6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아가5:2-6)
이 장면은 신부가 편안하고 안락한 자기의 집에 있는 걸 보여줍니다. 잠자는 중에도 그녀의
마음(heart)은 깨어있습니다. 잠이 들었을 때도 마음은 깨어있으니 사실 그녀는 최고
의 영적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녀는 믿는 자들의 집에서 편히 쉬고 있으면서 자기 앞에 또 다른 단계가 기다리고 있고 그 단계에서 실패할 거라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문, 예를 들면 사역의 문을 통해 들어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다른 문들로 주님이 오시리라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그녀가 몰랐던 뒷문으로 오셔서 그녀를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구절에서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이 구절에는 매우 깊은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신부는 밖에서 그녀를 부르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난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단다. 나를 위해 문을 열어다오: 해는 저물었고 어두운데 나는 혼자 밖에 있구나. 내 주변에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있단다.”
그러나 신부는 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둠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어둠은 밖에만 있을 뿐 이예요. 난 더 이상 어둠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난 이제 어둠을 떠났어요.”
신부는 그리스도가 그녀를 뒷문에서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은 어떤 어려움들을 겪고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을 통해 그녀를 불러서 그녀를 통해 영광 받고 싶어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은 그녀의 삶에 일어날 수 있는 어떤 문제를 통해 그녀를 불러서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녀 자신에겐 치명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구실은 논리적입니다:
“이것은 절대 예수님의 목소리 일리가 없어요. 그 분은 절대 내가 다시 어두움 속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할 리가 없어요. 난 절대 다시 수치 가운데 있을 수 없어요. 난 이미 영광의 예복을 입었다고요. 그 분 때문에 이 예복을 입게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수치의 옷을 입을 수 있나요? 난 이미 수치의 단계는 벗어났고 그건 과거일 뿐인데, 어떻게 다른 믿는 자들 앞에서 수치스러움을 겪을 수 있나요?”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여기에서 옷은 외모를 말합니다. 신부는 자신이 이미 영광스러운 겉모습을 가졌고 그것을
절대 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발을 씻었고 다시 더럽힐 수 없습니다. 그녀
는 이미 은혜와 영광이 충만한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길로 갈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었던 질문을 기억해 보십시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네 주님”
그리고 예수님이 또 묻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네, 주님”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 세 번째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베드로야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엔 베드로가 매우 슬퍼했습니다.
이 세 번째 질문의 의미를 아십니까?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이 질문을 세 번 하신 거라고 말합니다. 가능성 있는 탁월한 해석이지만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런 뜻입니다: “너는 2 마일(5 리)을 동행하는 사랑으로 나와 함께 걸어 갈 준비가 되었느냐?” 예수님은 이전에 이미 산상 수훈에서 5리를 걷는 것(마5:41)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준비 됐습니다.” 2 마일을 동행한다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헌신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할 수 있고 준비됐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그 다음입니다. “베드로야, 너는 3 마일을 동행하는 사랑으로 나와 같이 걸을 준비가 되었니? (이것은 2마일 동행의 연장선에 있는 신비한 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나요? 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으신가요? 3 마일을 동행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그러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겁니다: “베드로야, 네가 날 사랑하는 걸 안다. 하지만 3 마일의 동행을 알지 못하니, 너의 사랑이 나와 함께 3 마일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랑인지는 모르겠구나.”
“그러면 3마일을 동행하는 사랑은 뭔가요?”
“그것은 나처럼 되는 것이다: 못 박히고, 죽고, 내가 십자가를 진 것처럼 수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 존귀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첫 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간이었습니다. 둘 째 해에는 모든 학자들이 말하듯 예수님은 존귀함으로 가득 했습니다. 하지만 셋 째 해에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방해가 증가했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인지 아니면 사단의 선지자인지, 사단의 왕자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수치와 십자가로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부활과 구원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다시 베드로에게 돌아가 봅시다.
“베드로야, 3 마일을 걸어갈 준비가 되었느냐?”
“3 마일이 무슨 뜻인가요, 주님?”
“너의 논리적 생각에서 벗어나라. 네가 걷는 길 가운데 고통, 고난 그리고 수치가 다가올 때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거란다. 네가 나와 온전히 하나가 되길 원한다면, 나는 의의 그리스도이지만 동시에 죽임 당하고 십자가에서 수치를 감당한 그리스도 이기도 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난 죽음에서 부활한 그리스도 이기도 하다. 이것이 나의 길이다. 네가 3 마일을 동행하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길 원한다면, 다른 사람이 너를 묶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이제 다시 신부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오 신부야, 나의 목소리를 듣고, 나를 알고, 나에게 가까이 오길 원하느냐? 나는 예상치
못한 뒷문으로도 들어올 수 있단다. 난 너에게 너의 외모가 망가져 버릴 비가 내리는 곳에, 어둠이 있는 곳에 나와 함께 가자고 할 수도 있단다”.
“물론 너는 신부로서 외모가 중요하다는 걸 안단다. 너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비, 어둠, 진흙과 같은 것들은 저를 망가트릴 거예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손상될 수 없어요. 당신의 영광스러운 신부로서 좋은 모습은 유지하는 것이 잘못된 게 아니잖아요. 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렇게 있고 싶어요. 저는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이것이 제가 받은 가르침이에요.”
“미안하구나 신부야, 그들이 교회에서 너에게 가르친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를 위한
영의 음식이었단다. 그들은 아직 너에게 세 번째 단계의 음식을 주지 않았어. 그렇기 때문에 네가 세 번째 단계로 준비가 되지 않은 거란다. 너는 아직 3 마일을 동행하는 사랑으로 준비되지 않았단다.”
아가서 4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신랑은 신부가 아직 이 단계의 음식을 먹지 못한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신부의 삶에서 부족한 부분을 바로잡아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4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이런 종류의 영의 음식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녀는 그런 날씨에 밖에 나가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신랑은 신부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랑은 신부의 마음(heart)의 문, 즉 사랑의 문을 두드리고자 했습니다. 신랑은 문틈으로 사랑의 손을 내어 밀었습니다. 신부는 그분의 사랑의 상처들을 보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그분을 위해 문을 열기를 원했지만 속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heart)은 그분을 따르고 싶지만, 그녀의 생각(mind)은 진흙, 어둠, 그리고 밖에 내리는 비를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heart)은 그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지만, 그녀의 생각(mind)은 그녀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5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지는구나”
우리는 몰약이 고통과 연관된 것을 의미한다는 걸 압니다. 신부는 신랑을 향한 사랑에 이끌려서 문을 열고 있지만, 동시에 고통으로 가득 차서 마음과 손에서는 몰약이 흘러 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전 주님을 사랑합니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고 싶지만 주님과 이 길을 같이 걸어갈 수는 없어요. 너무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괜찮단다. 하지만 나는 나눠진 마음으로 나를 따르는 자들과는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너를 떠날 수 밖에 없구나.”
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신랑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신부를 데려갈 수가 없습니다.
신랑이 이미 가고 없을 때 신부가 깨어납니다. 그녀는 이제 내면으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신부는 신랑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수치를 겪더라도 그를 따라가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그녀는 그의 뒤를 쫓아서 신랑을 찾으러 나갑니다.
“조심하세요 신부! 비와 진흙을 조심하세요!”
“그것은 더 이상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난 그를 떠날 수가 없어요. 이제 나는 수치와 고통의 길,
3 마일을 동행하는 사랑을 받아들였어요.”
7절에서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7성 안에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져갔도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신부가 신랑과 함께 걷고 있는데 예복을 빼앗기는 것이 가능한 가요? 그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그분과 함께 걷는 것이 가능한가요?
이것이 처음부터 그녀를 방해하고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으로
깨어났을 때, 다른 말로 표현해서 그녀가 사랑의 음식을 그리스도의 손으로부터 직접 받았을 때, 그녀는 주님을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다.
예언적으로 “손”은 주어지는 음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분의 손을 내밀었을 때, 이것은 마치 사랑의 음식으로 그녀의 영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영의 음식을 먹은 후에 그녀의 영에 변화가 옵니다. 이제 그녀는 고통, 수치, 그리고 고난으로 가득 찬 3마일의 사랑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영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음식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신부는 비록 순찰하는 자들이 자기를 다쳐 상하게 하였고 자기의 겉옷을 벗겨서 가져갔지만, 그래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 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의 교회는 3 마일의 사랑으로 주님과 동행할 준비가 된 신부의 사랑이 너무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고통과 고난들은 죄로 인해서 인류가 받은 깊은 상처들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합니다. 이렇게 정결하게 하는 고난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신부를 위한 마지막 장신구들로 단장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런 깊은 영적인 삶과 영적 유산들은 초대 교회가 신부적 사랑의 단계에서 살도록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박해와 순교적 고통 가운데서도 굳게 서있을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도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순교하고 박해를 받을 때 굳건히 서있을 수 있는 이유는 강한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입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3 마일을 동행할 수 있도록 그들이 받은 사랑의 음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의 강한 사랑의 연합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서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있었을 때에도 도망치기를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임 당한 사랑’입니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자신의 사랑인 것입니다.
역사는 교회가 순교로 많은 사람들을 잃었을 때 동시에 ‘죽임 당하는 사랑’을 보고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더 많이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뒤에 있는 신비이며 구원의 온전한 능력입니다.
요즘 같은 마지막 때에 교회는 영적 유산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 교회가 마지막 장신구를 달고 신부로 단장되도록 준비되게 하는 ‘죽임 당하는 사랑’입니다.
